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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봉투를 펼쳐 둔 저녁

텃밭에 무엇을 심을지 정하려고 씨앗 봉투와 빈 종이를 한꺼번에 꺼내 놓았다. 해마다 고르는 일은 금방 끝날 듯하면서도 막상 시작하면 오래 걸린다. 잎이 무성한 것, 열매를 기다려야 하는 것, 자리를 오래 차지하는 것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옮겨 보았다. 종이 위에는 상추, 오이, 가지, 고추가 차례로 적혔다가 두 줄씩 그어졌다. 심기도 전에 밭이 꽉 찼다. 욕심이 먼저 자랐다. 상추는 빼기 어려웠다. 씨를 조금만 뿌린다고 해놓고 손끝에 힘 조절이 되지 않아 한곳에 몰아 떨어뜨리는 장면까지 벌써 떠올랐다. 솎아 낸 어린잎도 먹을 수 있으니 괜찮다는 핑계는 늘 준비되어 있다. 다만 한꺼번에 올라온 잎을 제때 거두지 못하면 금세 억세지고, 그제야 너무 많이 심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올해는 봉투를 반도 열지 않겠다고 종이 한쪽에 작게 적었다. 지킬지는 모르겠다. 오이는 울타리를 세워야 해서 망설여졌다. 줄기가 기대어 올라갈 곳을 만들어 주면 바닥을 덜 차지하지만, 처음부터 자리를 제대로 잡지 않으면 덩굴이 제멋대로 옆으로 누웠다. 누운 줄기를 다시 들어 올릴 때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몰라 한참 손을 멈추곤 했다. 그래도 잎 아래 숨어 있던 작은 오이를 발견하는 순간은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어제는 없던 것이 손가락만큼 길어져 있는 광경은 매번 조금 이상하다. 그래서 두 포기만 남겼다. 가지와 고추 사이에서는 연필 끝이 오래 머물렀다. 둘 다 심으면 간단한데, 그렇게 하나씩 받아 주다 보면 좁은 밭에 발을 디딜 틈이 없어진다. 가지는 윤이 나는 짙은 껍질 때문에 끌렸고, 고추는 자주 따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놓기 어려웠다. 수확한 뒤의 쓸모까지 따져 적다 보니 씨앗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아직 오지도 않은 계절을 배분하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가지 두 포기와 고추 세 포기로 적었다. 숫자는 자꾸 바뀌었다. 참, 뿌리채소도 한 줄쯤 넣고 싶었다. 무는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당근은 싹이 더디게 올라오니 둘 다 선뜻 고르기 어려웠다. 씨를 뿌려 놓고 며칠 동안 빈 흙만 바라보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 잡초인지 새싹인지 구별하지 못해 손가락으로 흙 가까이를 들여다보던 일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도 땅 아래에서 모양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잎채소와 다른 기다림을 준다. 당근 한 줄을 적었다. 종이에 네모를 그려 대강의 밭 모양을 만들고, 적어 둔 이름을 그 안에 옮겼다. 햇빛을 가릴 만큼 커지는 것은 뒤쪽으로 보내고 자주 손이 가는 것은 가장자리로 당겼다. 오이 두 포기가 생각보다 넓은 자리를 먹었고, 가지와 고추 사이에도 손을 넣을 간격이 필요했다. 상추는 남는 곳에 끼워 넣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남는 곳이 거의 없었다. 한 칸을 지우고 다시 그렸다. 종이가 먼저 닳았다. 다음날에는 종이를 들고 텃밭 앞에 섰다. 책상 위에서 반듯했던 네모는 실제 흙 앞에서 별 쓸모가 없었고, 가장자리도 생각보다 비뚤었다. 발을 들여놓을 길을 남기고 팔이 닿는 거리를 재어 보니 전날의 배치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흙 위에 가느다란 막대로 선을 긋고, 그 선을 밟아 없앤 뒤 조금 옆에 다시 그었다. 한 번 쯤은 계획대로 심어 보고 싶었지만 밭은 종이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선만 여러 개 남았다. 상추 자리는 처음 생각한 것보다 줄이고 당근 한 줄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오이는 울타리를 세울 쪽으로 붙이고, 가지와 고추는 잎이 겹치지 않을 만큼 떨어뜨렸다. 빈 구석이 생기자 다른 씨앗을 더 넣고 싶은 마음이 바로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이름을 적지 않았다. 흙이 보이는 자리를 남겨 두는 것도 배치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씨앗 봉투는 아직 뜯지 않았다. 오늘은 고르기만 했다. 봉투를 다시 늘어놓으니 제외한 것들이 오히려 또렷하게 보였다. 호박은 넓게 뻗을 것이고, 깻잎은 몇 포기만 있어도 씨가 떨어져 다음 철에 불쑥 나타날 수 있다. 방울토마토는 끝까지 망설였으나 지지대를 세울 자리가 모자라 봉투째 서랍으로 돌아갔다. 심지 않기로 한 이름 옆에도 작은 동그라미가 남아 있어 완전히 포기한 표시는 아니었다. 며칠 뒤 흙을 고르다 보면 빈틈이 더 커 보일지도 모른다. 아직 종이는 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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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머리 2일 전
심기도 전에 밭이 꽉 찬다는 말, 해마다 제 이야기입니다. 상추는 어차피 못 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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