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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래 머물던 오후

아침부터 비가 가늘게 내렸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라면 창을 닫고 다른 일에 마음을 붙였을 텐데, 오늘 비는 자꾸 바깥을 보게 만드는 쪽이었다. 유리에 맺힌 물방울이 한참을 버티다가 아래로 미끄러졌고, 먼저 내려간 자국을 따라 작은 물방울들이 뒤늦게 흘렀다. 흐린 날에는 시간이 조금 눅눅해지는 기분이 든다. 급할 것도 없는데 괜히 시계를 두 번 보고, 아직 이만큼밖에 지나지 않았나 싶어 다시 내려놓게 된다. 오늘이 딱 그랬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따뜻한 것이 먹고 싶어 물을 올렸다. 국물까지 거창하게 만들 마음은 없어서 말린 잎을 조금 넣고 오래 우렸는데, 예상보다 쓴맛이 강했다. 꿀을 넣을까 하다가 찬장을 열어 보니 바닥에 굳은 설탕만 남아 있었다. 숟가락 끝으로 몇 번 긁어 넣었더니 단맛은 별로 없고 사각거리는 소리만 컸다. 그래도 두 손으로 잔을 감싸고 있으면 무언가 제대로 쉬고 있다는 느낌은 났다. 맛보다 온도가 나았다. 며칠 전부터 보던 드라마를 이어 틀었다. 등장인물들은 오해가 생길 때마다 설명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다음 장면을 계속 눌렀다. 말을 한마디만 더하면 끝날 일을 여섯 회쯤 끌고 가는 데에는 대단한 인내가 필요해 보였다. 화면 속 빗소리와 창밖 소리가 섞이자 어느 쪽이 진짜인지 잠깐 헷갈렸다. 자막을 놓쳐 십 초를 되돌렸는데, 다시 봐도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 장면이 오래 남는다. 줄거리는 벌써 흐릿하다. 한 회가 끝난 뒤에도 화면을 끄지 않고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다음 회가 저절로 시작되기까지 남은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멈춤을 눌렀다. 꼭 보고 싶어서 본다기보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편함 때문에 계속 틀어 두는 날이 있다. 오늘은 선택하는 일 자체가 조금 귀찮았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젖은 수건을 지금 널지, 불을 켤지 말지 같은 사소한 것도 전부 결정처럼 느껴졌다. 몇일 전에는 반대였다. 가만히 있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참, 그날 오래된 서류 봉투를 열었다가 숫자가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 호봉이 한 칸 오른 표시보다 눈이 먼저 간 곳은 따로 있었고, 관사가 나온 뒤 매달 빠져나가던 큰 금액 하나가 사라진 일이 훨씬 선명했다. 표의 맨 아래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니 지난달과의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기뻐서 웃었다기보다는 어깨를 누르던 손이 잠깐 떨어진 듯했다. 종이는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오래 볼 일은 아니었다. 숫자를 확인하고도 사고 싶은 것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새 그릇을 살까, 두꺼운 이불을 바꿀까 생각했지만 어느 것도 급하지 않았고, 막상 주문 화면을 열자 색을 고르는 일부터 피곤했다. 대신 장바구니 안에 오래 들어 있던 말린 과일을 하나 지웠다. 없어진 금액이 생긴 금액처럼 느껴지는 건 묘했다. 손에 들어온 것은 같은데 마음속 계산에서는 전혀 다른 칸에 놓였다. 왠지 숨이 길어졌다. 그 정도면 됐다. 드라마를 멈춘 채 싱크대 쪽으로 가서 늦은 끼니를 만들었다. 양파를 반으로 가르니 매운 향이 올라왔고, 눈물이 날 만큼은 아니어서 괜히 한 조각을 더 잘게 썰었다. 팬에 기름을 두르자 빗소리가 잠시 묻힐 정도로 요란하게 튀었다. 달걀 가장자리가 먼저 익고 가운데는 오래 흔들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까 화면 속 인물들의 느린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소금을 너무 일찍 넣어 물이 생겼지만 그냥 밥 위에 올렸다. 모양은 금세 무너졌다. 김이 오르는 그릇을 들고 다시 창가에 앉았다. 처음보다 빗줄기가 굵어져 맞은편 풍경이 희게 번졌고, 유리 아래쪽에는 물이 한 줄로 고여 있었다. 한 숟갈을 뜨고 너무 뜨거워 한참 입안에서 굴렸다. 양파는 덜 익어 조금 아삭했고 달걀은 짰지만, 이상하게 손을 멈출 정도는 아니었다. 음식은 맛있을 때보다 배가 고팠을 때 더 빨리 줄어든다. 그릇 바닥이 곧 보였다. 비는 여전했다. 설거지는 바로 하지 않고 물만 받아 두었다. 따뜻한 물 위로 기름이 얇게 퍼지다가 가장자리로 밀렸고, 작은 거품 몇 개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했다. 아까 마시던 잔도 함께 담그자 굳어 있던 설탕 알갱이가 천천히 풀렸다. 화면에서는 멈춰 둔 장면 속 사람이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재생을 누를까 하다가 리모컨을 뒤집어 놓았다. 창문에 흐르는 물자국을 조금 더 봤다. 아직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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