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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래 머물던 오후

아침부터 비가 창문을 가늘게 두드렸다. 세차게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금방 그칠 기색도 없이, 유리 위에 맺힌 물방울만 자꾸 아래로 밀려났다. 이런 날에는 시간을 확인해도 숫자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직 이만큼밖에 안 지났나 싶다가도, 한참 멍하니 있었던 듯 오후가 불쑥 와 있다. 물을 끓여 잔에 붓고 나니 김이 안경 앞을 잠깐 가렸다. 차 맛은 평소보다 옅었다. 찻잎을 덜 넣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별다른 생각 없이 다시 닫았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닌데 입안이 심심했고, 그렇다고 단것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한참 서 있다가 감자 두 알을 씻어 얇게 썰었다. 기름을 조금 두른 팬에 겹치지 않게 올렸더니 가장자리부터 투명해졌다. 소금을 손끝으로 집어 뿌리다가 한쪽에 너무 많이 떨어져 그 부분만 털어냈다. 빗소리 사이로 기름 튀는 소리가 섞였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감자는 생각보다 천천히 익었다. 뒤집개로 자꾸 건드리면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두기가 어려워 몇 번이나 가장자리를 들춰 봤다. 노릇한 면이 나타날 때마다 괜히 잘한 일처럼 느껴졌다. 요리는 결과보다 기다리는 동안의 냄새 때문에 하게 되는 날이 있다. 접시에 옮긴 감자는 가운데가 조금 덜 익었고, 소금을 털어낸 자리에는 아무 맛도 없었다. 그래도 뜨거울 때 거의 다 먹었다. 남은 것은 세 조각이었다. 비는 그사이 더 촘촘해져 있었다. 창밖이 흐려지니 방 안의 작은 불빛들이 낮인데도 또렷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젖은 손을 닦은 뒤, 식탁 한쪽에 밀어 두었던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며칠 전부터 익혀 보겠다고 적어 둔 내용이 있었는데 첫 줄부터 낯설었다. 설명을 두 번 읽고도 순서를 반대로 적어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서른여덟. 이 나이에 다시 배운다는 말을 이렇게 자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말을 적고 보니 조금 우스웠다. 배운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보다 지우개 가루나 식어 버린 차에 더 가까웠다. 알았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다시 멈추고, 방금 읽은 문장을 또 찾고, 표시한 곳을 못 보고 페이지를 넘겼다. 어제는 자연스럽게 되던 것이 오늘은 엉키기도 했다. 반대로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 것이 갑자기 쉬워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 차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오늘은 잘 안 됐다. 아 근데 감자 냄새가 계속 남아 있는 바람에 종이를 보다가도 접시 쪽으로 눈이 갔다. 남겨 둔 세 조각은 이미 식어서 가장자리가 살짝 굳어 있었다. 하나를 집어 먹으니 뜨거울 때보다 소금 맛이 진했고, 가운데의 덜 익은 부분도 그대로 느껴졌다. 그래도 두 번째 조각까지 먹었다. 마지막 하나는 괜히 아껴 두었다가 종이에 기름 자국만 남겼다. 손가락을 닦고 다시 펜을 들었는데 방금 틀린 순서를 또 틀렸다. 왠지 웃음이 났다. 한동안은 펜 끝으로 종이 귀퉁이만 눌렀다. 빗줄기가 약해진 듯했지만 처마를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는 일정했다. 조금 전까지 답답했던 문장이 가만히 두고 보니 전보다 덜 낯설었다.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디에서 막혔는지는 알 것 같아 그 부분에 짧은 선을 그었다. 선이 비뚤어 다시 그으려다가 그대로 뒀다. 감자 한 조각도 그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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