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이 아닌 오후의 도서관
오일장이 서지 않는 날의 읍내는 이상할 만큼 넓어 보인다. 평소라면 천막과 손수레가 차지할 자리에 햇빛만 길게 누워 있었고, 문을 반쯤 내린 가게 앞에는 접힌 종이 상자 몇 개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점심을 조금 넘긴 시간인데도 거리는 저녁 무렵처럼 잠잠했다. 건너편 분식집 유리문에 붙은 메뉴판이 바람에 들썩였지만 안쪽에서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면사무소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간표 아래 적힌 다음 차 시각을 다시 확인했다. 삼십 분이면 짧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날은 앉아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거리가 비어 있었다.
정류장 의자에서 일어나 읍내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버스를 놓친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한 대를 보내기로 마음먹은 셈이었다. 장날에는 사람 어깨를 피해 걷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철물점 바깥에 세워 둔 빗자루의 붉은 손잡이, 오래된 세탁소 창문 안에서 돌아가는 옷걸이, 약국 출입문 아래로 말려 들어간 광고 종이 같은 것들이었다. 광주에서 오는 시외버스가 큰길을 한 번 지나가자 먼지가 낮게 일었고, 다시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 골목 모퉁이에서 도서관까지는 몇번 와 본 길인데도 가게 셔터가 내려가 있으니 방향이 낯설었다. 평일 오후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구체적이었다.
도서관에 갈 생각은 정류장을 벗어난 뒤에야 들었다. 가방 안에는 오전에 검토하던 출력물과 다 읽지 못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고, 어느 쪽도 지금 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냉방이 되는 곳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맞은편 건물의 반사 유리에 내 모습이 작게 겹쳤다. 출근할 때 입은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은 채였고, 장을 볼 계획이 없어서 빈 장바구니조차 들고 나오지 않았다. 장날이 아닌 날에는 필요한 물건이 없는 사람처럼 걷게 된다. 목적은 뒤늦게 생겼다.
도서관 자동문이 열리자 마른 종이 냄새와 바닥 세정제 냄새가 한꺼번에 났다. 안내대 옆 반납함에는 책이 서너 권뿐이었고, 어린이 열람실에서는 색연필 굴러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나는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를 골라 가방을 내려놓았다. 창가에 앉으면 밖을 오래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버스 시각을 놓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책을 꺼내고도 첫 장을 넘기지 못한 채 유리창에 비친 책장만 바라봤다. 사무실에서는 숫자 하나와 문장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어렵지 않은데, 쉬는 시간에는 짧은 문단도 자꾸 눈에서 미끄러진다. 그날도 그랬다.
한참동안 책을 펴 둔 채 빈 종이에 해야 할 일만 적었다. 저녁에 쌀을 씻어 둘 것, 세탁기에서 꺼낸 수건을 개킬 것, 남편에게 우산을 차에 두었는지 물어볼 것. 적고 보니 도서관까지 와서 쓸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펜 끝으로 목록의 네모 칸을 하나씩 그리다가 창밖을 보니, 아까 지나온 거리로 작은 화물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운전자는 문을 연 가게를 찾는 듯 몇 번 속도를 줄였지만 끝내 멈추지 않았다. 차가 사라진 뒤에는 바람에 밀린 비닐 한 장만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
참, 도서관 벽시계는 집에 있는 시계보다 유난히 크게 초를 넘겼다. 다음 버스까지 십 분이 남았을 때 책을 덮었는데, 읽은 것은 겨우 여섯 쪽이었다. 반납할 책은 안내대에 놓고 빌릴 책 두 권은 무인 기계로 처리했다. 영수증처럼 얇은 대출 확인표가 나오자 책 사이에 끼워 가방에 넣었다. 자동문 밖으로 나서니 들어올 때보다 햇빛이 기울어 있었고, 빈 거리의 그림자도 건물 쪽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긴 뒤였다. 나는 온 길을 그대로 되짚어 정류장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버스를 기다렸다.
면사무소 앞에는 아까 없던 사람이 두 명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검은 봉지를 발밑에 내려놓았고, 다른 사람은 접은 양산 끝으로 보도블록 틈을 가만히 건드렸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며, 셋 모두 말없이 같은 방향만 바라봤다. 잠시 뒤 굽은 길 너머로 버스 앞유리가 번쩍였고, 정류장 표지판 옆의 마른 풀이 먼저 흔들렸다. 나는 가방 속 책 모서리가 출력물을 구기지 않도록 손으로 한번 눌렀다.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도서관 대출 확인표의 얇은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버스가 천천히 섰다.
♥ 좋아요 16
💬 댓글 0
↗ 공유
👁 813